광도면 발자취 찾기 - 임중 마을

가방 싸기 2010/09/01 04:10 Posted by 바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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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봉암 성석의 비밀을 품은 임중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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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안 마을. 그 싱그런 이름을 되새기며 일행의 차가 공단을 바삐 지나가기를 바랐건만 그 바람은 맥없이 꺾이고 말았다. 조선소 한가운데에 차가 서길래 누가 화장실에라도 들리나 했더니 여기가 임중이니 내리라는 것이 아닌가. 당산나무도 있고, 마을회관도 있지만 그것이 전부라도 되는냥 ‘마을’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가 없을뿐더러, 숲은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사진 한 장 건지기도 어려울 것만 같은 임중 마을은 그러나 사진보다 100배 재미나는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눈을 크게 뜨기보단 귀를 쫑긋 세워야 이 마을의 뿌리를 잡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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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나무가 있는 마을 입구에 조선소가 있어 ‘숲안 마을’이라는 이름에 걸었던 기대가 훌쩍 날아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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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어져가는 마을 사이로 조선소 구조물이 다급하게 보인다.














영천이씨 세적비를 세우다

“잔치가 엄청 컸지. 전국에서 차가 몇백대가 왔다쿠몬 상상도 못할끼라. 질도 있지도 않은 상태에서 빈 논에 차 댈 데를 맹글고. 버스가 몇 대더라...하여튼 엄청난 사람이 왔었어. 천 몇백명인가...야당 총재 이기택이도 왔었고...”

마을회관에서 만난 한 어르신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1986년에 영천이씨 세적비를 세울 때의 모습이다. 제막식을 겸해 영천이씨 전국 종친회를 여기서 연 것이다. 어르신께는 이것이 임중에서 평생 본 것 중 가장 큰 잔치라고도 한다. 그러니 “임중에서 특출난 거 하나만 알려주세요”라는 일행의 질문에 이것을 제일 앞머리에 놓았을 것이다. 뒤늦게 마중을 나온 이판열 이장도 마찬가지다. “이만한 세적비를 가진 데는 흔치 않을 것”이라며 일행을 급히 세적비 앞으로 이끈다

마을회관 코앞에 있는 영천이씨 세적비는 과연 내놓고 자랑할 만큼 우람하다. 서체 또한 미려한 비문 중 임중에 영천이씨가 집성촌을 이루게 된 까닭이 든 부분을 옮기면 이렇다.

자 휘 제는 왜란을 피하여 창원군 구강산에 남하이거하였다가 별세하고 기처 밀양박씨는 지리한 전난중이오나 기시에 이충무공께서 신기한 전략으로 귀선을 써서 왜적을 격파하였음으로 남방의 연해제군은 안도할 수 있었기에 삼자 종만 종렬 종업을 거느리고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고현 거제등지에 경유하였다가 통영군 황리에 정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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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중 마을에서 가장 큰 자랑거리는 영천이씨 세적비다. 1986년에 영천이씨 전국 종친회을 이곳에서 하면서 이 세적비의 제막식을 가졌다. 이 세적비는 옮기기로 결정했지만 아직 장소가 정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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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 얼굴과 발이 다른 데서 보던 엄숙한 것과는 달리 조금 해학적이다. 비석이 조금도 무겁지 않다는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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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촌에 있는 영천이씨 제실. 음력 10월20일에 통영과 서울 등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제를 지내는데, 지난해에는 70명 정도가 모였다고.



영천이씨 세적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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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적비 뒤에 비문이 미려한 서체로 새겨져 있다.

의사공파통영문중적서문은 세태가 바뀌어 족보 발간에 소홀하고 선조들의 업적을 기리지 못한 점에 유감을 표하는 한편 세적비문도 함께 실었다.

통영군 북 면화산 하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황리촌은 영천이씨 세거지지라. 이씨는 영우명족으로 피난남하하여 이곳에 정주해 자성일구로 자손이 번창하고 세덕인문이 계계면면하여 남주의 성족이 되었다. 일찍 그 추원지하에 경모재를 세워 선조의 유덕을 추모하였으나 그 선세가 국가의 위난을 당하여 수난곡절이 너무도 많았으며 백난을 무릅쓰고 악토를 찾아서 자손만대의 번영을 누리게 하신 유업을 다시 한 번 상기불망 하려 한다.

안 이씨는 고려평장사 휘 문한께서 시조이시고 누전하여 신호위대장군봉영양군 시 문정공 휘 대영께서는 중조이시며 기후로 잠조계승하여 려말에 보문각대제학판도판서 휘 석지께서 절의를 지키시와 두문동 칠(七)십(十)이(二) (10페이지 13줄)으로 세칭 남곡선생이시며 입이조하여 부사직 휘 현실께서 영천에 환거하시고 자 휘 보관께서 문과풍저창부사이시니 백형충장공 휘 보흠께서 세조 정축에 순흥부사로 계시면서 금성대군과 단종복위를 모의하였다가 거사전에 발각되어 극형을 입었을 제 공이 위난을 무릅쓰고 백공의 유해를 수렴하여 영양선영하에 반잔하고 팔공산하재관동에 은거하면서 세보라 개명 둔적하였으니 복소여란으로 자손이 어찌 입명생세하리요.

이백년 후 영조에 신원하여 조가숭장지전으로 이존판서를 추증하였으며 휘 익인은 훈도요 자 휘 세진은 은덕하고 자 휘 유는 호 파선이니 (11페이지 9줄) 은덕하고 자 휘 정분은 임진난에 백의창의하시와 겁림박연자인등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족질 영근(11페이지 12줄) 십(十)육(六)의사와 함께 경주전진에서 순절하였으니 그 사실은 초유사학봉김성일장계중에 녹재되었으나 그 정충고절을 국가포전이 없었으니 실로 개탄할 바이로다.

그 자 휘 제는 왜란을 피하여 창원군 구강산에 남하이거 하였다가 별세하고 기처 밀양박씨는 지리한 전난중이오나 기시에 이충무공께서 신기한 전략으로 귀선을 써서 왜적을 격파하였음으로 남방의 연해제군은 안도할 수 있었기에 삼자종만 종렬 종업을 거느리고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고현 거제등지에 경유하였다가 통영군 황리에 정착하였다.

백공 종만은 이제와 함께 궁경치가하여 편모를 봉양하며 여력으로 송독하여 수신제가지도에 용의하고 가풍을 진작시켰다.

이씨 선세의 휘적을 살펴보면 남곡선생의 불사이군 충절과 부사공의 모거수시의거와 의사공의 살신구국정충과 유이낙씨의 낙토점기하신 그 찬란한 세덕은 천추에 휘영할 것이로다.

아! 년대가 구원하고 병난을 누경하여 선대묘소를 실전함이 많아서 부사공은 대구시 동구 지묘현에 설단향사하고 훈도공 휘 익인과 처사공 휘 세진과 처사공 휘 유와 의사공 휘 정분과 처사공 휘 제 의 오위는 이 곳 경모재에서 세일제향하고 이제 궁비를 세워 유덕을 추모하려 함이니 이곳이 비록 이씨선대의 옛 고장은 아니지만 자손이 살고있어 유풍이 남았으니 신리인정에 윤합될 도리일 것이로다.

차호 금세에 윤리가 퇴패하고 물욕이 도천이오나 오직 이씨일문은 보본의 의를 밝히며 기세헌문적을 갖추어 불녕한 형락에게 보이며 비문을 청하니 기선제문자가 개명대가 소술이라. 이 어찌 실록이 아니리요. 이제 감념하고 서술하여 이씨 자손으로 하여금 영세 상모케 하려는 바이다.


아이 대신 안태를 던지다

이 딱딱한 문장에 임중 어르신들의 구술과 주위 산사의 유적을 섞으면 웬만한 ‘전설의 고향’은 울고 갈 만한 설화가 펼쳐진다. 비문에는 이제가 왜란을 피해 남하이거하였다고 쓰여있지만 출발부터가 이렇게 밋밋해서야 전설이 되겠는가.

전해지는 이야기는 이제가 이순신 장군이 맹활약한 임란에 적극 참여하여 진주에서 장렬히 전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에 밀양박씨는 어린 아들들을 데리고 배에 올라 거제도로 피난을 가다 진해만에서 아기를 낳는다. 그 순간 난데없이 북풍이 몰아치는 데다 배도 꼼짝을 않으므로 뱃사공과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아기를 바다에 바쳐야 한다고 다그친다. 박씨는 차마 아기를 버릴 수가 없어 대신 아기의 안티(안태)를 던졌더니 모진 폭풍도 멎고 배도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제야 사방을 둘러보니 당초에 가려던 거제도에는 눈이 쌓여있고 황리 쪽은 따뜻해 보여 이곳이 살기 좋은 곳인 줄 알고 뱃머리를 돌려 지금의 내촌 딱밭골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곱 살 소년, 은봉암에서 도를 닦다

임중 마을은 주민 80% 이상이 영천이씨 집안일 정도로 대단한 집성촌이었다. 이제 20여 가구밖에 남지 않았고 이마저도 모두 임외 마을에 조성 중인 이주단지로 옮겨가야 하지만 한 때는 통영, 고성 그리고 임중을 합해 영천이씨만 800여 가구가 살았다니 이만한 설화가 없을 리가 없다. 그러나 영천이씨의 진짜 설화는 이제부터다. 밀양박씨의 꾀로 인해 목숨을 건진 삼남 종렬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종렬은 일곱 살 때 출가해 안정사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칡넝쿨과 가시덤불 때문에 사찰은커녕 길조차 찾을 수가 없어 주문을 외우니 덤불이 걷히고 지금의 은봉암이 눈에 띄었다. 소년이 이 암자에서 수도하며 천기를 모으는데, 하루는 합천 해인사에 큰 불이 난 것을 알고 병풍을 친 다음 먹을 갈아 솔잎으로 먹물을 뿌리고 주문의 외우니 불현듯 청천에 먹구름이 일더니 비가 왔다는 것이다.

여기엔 다른 설도 있다. 솔잎으로 먹물을 뿌린 게 아니라 종이에 물을 적셔 은봉암 기둥에 붙여 불을 껐다는 것이다. 또 해인사의 불이 꺼지는 것을 본 양산 통도사의 큰스님이 서쪽을 바라보며 이종렬 대사의 공로임을 알아챘다는 이야기가 덧붙는다.

선인이 태어나면 은봉암 바위가 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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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렬 대사는 축지법을 쓰고 예지력을 지닌 인물로도 통한다. 내촌의 고인돌, 그러니까 황리사람들이 사석바위라는 것도 실은 고성 산신령이 아니라 이종렬 대사가 축지법을 쓸 때 딛고 다니던 바위라는 설도 있다. 그 예로 밀양박씨가 작고했을 때 누군가 비보를 전하러 은봉암을 찾았더니 “알고 있었노라, 이만 가보라” 하길래 곧장 되돌아오니 종렬대사가 먼저 집에 와 있더라는 것이다.

“은봉암에는 큰 돌이 원래 세 개가 나란히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뿐이라. 그 돌이 하나 넘어질 때마다 선인이 태어났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두 번째 도인이 이종열 대사인기라. 인자 한 개밖에 안 남았는데 어느 선인이 언제 날지 누가 알것노”

마을회관에서 들은 어르신의 이 말과 별반 다르지는 않지만 은봉암을 자주 찾는다는 이가 전해주는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은봉암에서 득도를 하는 스님이 나면 이 성석이 하나씩 무너지는데 그 첫 번째가 노혜월(盧慧月) 스님이고, 두 번째로 득도한 스님이 불교사에 한 획을 그은 종렬 대선사라는 것이다. 득도한 그는 은봉암을 떠나면서 開花黃里 落花紅榴(개화황리 낙화홍류)라는 명언을 남겼다.
은봉암 성석은 원래 3개가 나란히 있었으나 선인이 태어날 때마다 하나씩 쓰러진다는 설이 있다. 그 두 번째가 종렬대선사라니 이제 마지막 선인이 기다려진다.

어쨌거나 이제 은봉암에 하나의 성석만 남았다. 고승이 득도하길 바라거나 선인이 태어나길 바라거나 사람들은 모두 이 바위가 쓰러지기를, 이 복잡한 세상을 정화시킬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런 기다림이 어찌 임중이나 황리만의 것일까.

술 취해야만 보이는 백여우

황리에는 이종렬 대사만큼이나 유명한 설화가 하나 더 있다. 술취한 사람에게만 보인다는 백여시(백여우) 이야기다.

임내에서 임중 마을 입구 사이에는 석지골이라는 꽤 비탈진 골짜기가 있었다. 마을로 가는 지름길이긴 하지만 밤길은 맨 정신에도 여간 위험하지가 않아 한 발만 잘못 디뎌도 사고를 당하기 일쑤인 곳인데 이 골짜기를 지나는 취객이 사고를 당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백여우 덕분이다.

“술이 딱 돼 가지고 석지골에 올라서면 앞에서 허연 게 채리보는기라. 그래서 그걸 잡을라꼬 하면 도망가고 잡을라꼬 하면 도망가고, 그라다보몬 임중 마을회관 앞에, 딱 거기를 언제 우찌 왔는지도 모리고 와 있는기라. 그 백여시는 술 안 무그몬 절대 못보는기라.”

내촌에 갔을 때 거기 이장이 들려준 이야기니 황리에서 이 백여우의 인기가 예사롭지 않은 모양이다. 임중 어르신은 여기에 한 술 더 떠 아이 업어 가는 백여우라고도 한다.

“옛날에는 마을에 열병 같은 전염병이 돌면 얼라들이 많이 죽어나갔제. 그걸 땅에 묻어두면 그 백여시가 와서 안 업고 갔나”

취객이야 목숨을 살리려고 출현한다손 치더라도 죽은 아이는 왜 데려갔을까. 아무도 아이를 ‘물어갔다’고 하지 않고 ‘업어갔다’고 표현하는 걸 보면 죽은 아이들끼리 딴 세상에서 손잡게 놀게 만든 것은 아닐까. ‘백여우’ 하면 나쁘게만 들었건만 이런 상상을 해보니 하이얀 천사가 따로 없다.

함께 하기엔 너무나 가까운 마을과 조선소

“요샌 백여시는 커녕 여시 자체가 이실란가도 모리것다. 철판을 함 치몬 소리가 쩌렁쩌렁하고 귀가 머엉 우는데 우찌 살것노.”

사실 임중 마을의 남은 20가구는 조선소와 가까워도 너무 가까운 곳에 남았다. 아니 조선소가 너무 다급하게 동네를 치고 들어왔다. 그러니 백여시는커녕 당장 주민들 귀청부터 떨어져나갈 판이다. 밤이고 낮이고 들리는 소음만 생각하면 이주단지로 가지 말라고 해도 가겠지만, 성동조선이 내촌과 임중 마을 주민들에게 제안한 아파트가 담보 잡힌 것이라는 게 확인되면서 입주를 꺼리고 있다. 통영 아들네로, 부산 딸네로 갈 데 있는 사람들이야 보상받고 가버리면 그만이지만, 담보 잡힌 아파트엘 무턱대고 들어갈 순 없는 노릇이다. 담보가 풀린다고 해도 문제는 하나 더 남았다. 분묘에 대한 보상문제다. 분묘는 영천이씨들에겐 430년을 넘게 이어온 그들의 뿌리이지만 조선소 입장에선 그 세월을 셈할 수 없는 노릇이다.

“조선소 들어 모연서 바다가 없어졌으니 배는 전부 딴 데로 돌리삤지. 땅도 저거가 다 보상했으니 저거 끼라꼬 시금치도 몬하라 카제. 이사 오라는 아파트는 담보 잽힌 기재. 환장할 노릇 아이가.”

농촌반, 어업반으로 조화롭게 살던 임중 마을. 안정, 황리 체육대회에 가면 1등도 하고 주민들 단합도 잘 되어 우수 새마을 특별 지원금도 받았고, 90세 노인이 경운기를 쟁쟁하게 몰고 다니는 장수마을로도 손꼽히지만 임중 마을은 이제 송두리째 사라질 수밖에 없다.

“이왕지사 이렇게 되삔 거 속이나 안 씩이면 좋것다.”

담배 연기와 함께 뿜어내는 한 어르신의 푸념이 귓가에 오래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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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우수 새마을 특별 지원금 300만 원을 대통령으로부터 받았고, 1984년에는 광도면 새마을 청소년 경진대회에 나가 단체전 1위를 입상한 흔적이 마을 회관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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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회관과 구멍가게 사이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조선소가 있어 주민들은 소음에 시달린다. 마을은 이미 비워져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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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르치, 돔, 감성어, 오징어...괴기가 얼마나 많이 났었다고!” 한 어르신의 회상은 벌써 현실 저편으로 건너갔고 그 자리에 조선소가 들어섰다. 이제라도 지속가능한 오늘과 내일을 설계할 때다.

... 그리고 남은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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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8일, 그러니까 음력 정월 보름에 임중 마을은 마지막 동회를 가졌다. 이미 이주를 간 주민들도 삼삼오오 모여들어 정든 마을의 옛 이야기를 하나씩 주고받았다. 음식을 준비하고 켜켜이 올려 쌓은 상이 눈에 띈다. 저 상, 이제 어디서 제몸을 세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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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안황체육대회 릴레이 우승을 비롯, 갖가지 트로피와 상장들이 마을회관에 늘렸다. 마을 어르신께 임중 사람들이 힘이 좋았냐고 여쭈니 그 대답이 시원하다. “힘 좋은 사람이 1등 하나, 머리 잘 돌아가고 기술 좋은 게 1등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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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제를 지내던 팽나무는 1971년에 보호수로 지정되었지만 태풍 매미 때 두 동강 나서 많이 아팠다고. 마을 어른들은 이 나무가 400년은 더 된 것이라고 하지만, 안내문에는 1971년 당시 200년쯤 되는 것으로 기록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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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목욕탕은 공단에 새로 생겨난 사우나, 찜찔방 등에 밀려 밀려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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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담배, 빵, 잡화, 달걀, 막걸리, 온두부, 파전...이런 구멍가게가 요즘으로 치면 마트쯤 되는 거라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구멍가게는 마트에서는 살 수 없는 향수도 덤으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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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엔 잔디가 깔리고 장독대엔 안채에 딸린 나무 정지문이 향그롭다. 별채 귀퉁이에 있는 마루도 무척이나 걸터 앉고 싶게 생겼는데, 유독 황리에 이런 식의 별채가 많은 듯하다. 이런 집 한 채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동하는데 이 집에 살던 아이가 그린 ‘내 집’은 아파트를 많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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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강아지는 제 집에 푸른색을 입혀준 주인을 따라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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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회관과 원룸에 놓인 신.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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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문드문 초가집도 보이는 임중의 옛 사진. 아낙네들이 돌을 지고 나르는 것을 보면 아마도 새마을 운동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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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숙 같은 방이나마 싼맛에 다닥다닥 붙어 지내던 노동자들도 새 둥지를 찾아 떠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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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과’라는 것으로 공부하던 시절이 언제더라 싶어 신문 벽지를 살피니 1980년 11월 27일(목) 서울신문이다. 한자 병기에 세로 쓰기까지, 이런 신문을 지금 젊은이들에게 읽으라고 하면 몇이나 정독할 수 있을까. 언론이든 권력이든 권위주의 시대는 지났다는 말이 새삼 실감나고 안도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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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걸린 연장통을 보고 솜씨 꽤나 있겠다 싶었더니 화장실을 이토록 재치있게 꾸몄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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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씨 그리운 솜씨에 향그런 꽃찌짐’이라는 김상옥의 싯귀 중 '꽃찌짐' 대신 ‘북어국'을 넣어 후루룩 다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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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나무가 있는 돌담집. 남도 시골집의 운치가 잘 베여 있어 더욱 아쉽다. 사라지는 모든 것이 다 그렇지 않겠는가.










*이 포스트는 2009년 통영RCE 광도면 주민자치센터 특성화 프로그램에 쓴 것을 일부 옮긴 것입니다

2010/09/01 04:10 2010/09/01 04:10

RCE Jeju Story 1

가방 싸기 2010/07/30 19:27 Posted by 바다리

통영에 내려온 뒤 생겨난 현상 중 하나는 서울에서 그토록 갈구하던 해외여행에 대한 욕심이 뚝 끊겼다는 것이다. 아니 끊겼다기보단 아예 사라졌다는 게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서울 도심에 살던 때처럼 무언가에 찌들 일 일이 없을뿐더러 어디에서고 눈만 돌리면 바다인 데다 지천에 널린 섬들을 밟아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휴식이 되었기 때문일 터다. ‘여행하듯 산다’는 꿈같은 이 말의 어디쯤까지는 닿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통영RCE에서 제주도로 시민교육분과 위원회 워크샵을 가자고 했을 때 서울에서와는 정반대의 이유로 따라나서게 되었다. ‘워크샵’이라고 하면 회의보다는 여행에 욕심을 두게 마련이지만, 이번엔 정말 워크샵만 아니었으면 굳이 제주도까지 가진 않았을 것이다. 통영을 벗어나기 싫어진 병이 아직 낫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처한 입장도 있고 해서 조금은 무거운 마음으로 동행하게 된 제주도 워크샵. 나는 거기서도 (뜻밖에)충분히 여행을 즐겼다. 오름이나 돌하르방도 반가웠지만 사람이 더욱 신선했다. 통영에선 다소 무뚝뚝하게만 만났던 시민분과위원회 동행자들이 제주도에선 또다른 모습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초면이 아니어서 저으기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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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CE의 ‘동이’, 변원정 팀장. 제비 새끼들이 모이를 먹는 모습을 찍고 있다. 정작 (남)제비에게 찍혀야 할 사람은 본인이건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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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RCE 시민교육분과의 막내 황정일. 나와 같은 (가)방을 쓰는 이 연하의 친구에게 하마터면 시집갈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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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몸에도 기꺼이 동행하신 윤종건 계장님. 방명록에 글을 남기는 모습이 사뭇 진지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늘 많은 힘을 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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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말이 없는 그 사람~’ 김성완 통영문화원 사무국장. 하지만 다가서기만 하면 언제나 푸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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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CE는 나다’는 한 마디로 좌중을 압도했던 통영수산과학관 차용택 연구사. 아~주 말투가 느리지만 그 속에 위트와 진솔함이 늘 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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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웅 해양소년단 부장. 통영에서 조 부장 만큼 무대에 많이 오른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시길. 재치 만점의 싸나이이자 항상 믿음이 가는 든든한 리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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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늘 미소가 떠나지 않는 강분에 YWCA 사무총장님. 이미 통영 전체에 깜찍, 발랄, 상큼한 여인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고 하나 개인적으로는 제주도에서야 그 진면목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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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기업 ‘피플&라이프’의 김승우 대표. 동행 중 통영RCE와는 가장 오랜 인연을 가지고 있다. 그림과 노래 등에 엄청난 포스를 가지고 있으니 곧 그 작품과 노래에 감탄해 마지 않을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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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대학교 환경 동아리 ‘에코캠퍼스’의 이은경. 얼굴도, 몸매도, 말솜씨도 이쁘기만 하다. 차세대 여성일꾼으로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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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어쩜 힘들어도 그렇게 잘 웃니?’. 통영RCE 사무국의 마당쇠 임정빈. 노가다성 막일은 혼자 다 하면서도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으니 그대의 가슴이야 말로 잘 쓸린 마당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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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사연구회 박정욱 선생님. 통영 길라잡이일 뿐 아니라 통영인 길라잡이이기도 하다. 이순신과 한산대첩, 그 속에 숨은 의미들을 오늘과 내일의 발전적 모델로 삼아야 한다는 가르침은 늘 뼈에 새길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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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국제음악제 박경원 실장님.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라는 캔디 노래는 항상 밝은 실장님의 모습을 보면 얼마나 소극적인지 알 수 있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웃어~’라고 개사해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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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점 짜리 남편 자랑에 항상 바쁜 통영옻칠회 전수희 선생님. 회식 때 절대 옆자리를 피하시오. 안 그럼 사망할 수 있음. 늘 큰웃음을 안겨주셔서 모두가 지진 마음을 훌훌 날려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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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RCE에 가장 열정적으로 임하시는 해양구조대 김영식 대장님. 추봉도에 거처하시면서도 RCE 시민교육분과의 일이라면 한번도 빠지는 법이 없으시다. 사모님마저 열혈 RCE 멤버로 바꾸실 정도. 늘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알짜 대장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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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대학교 환경동아리 ‘에코캠퍼스’의 핵, 김덕길. 밥 많이 먹는다고 구박했더니 살을 왕창 빼버리는 것으로 대
항하는 희대의 배우. 지금은 다시 식욕을 되찾고 말없이 꿋꿋하게 RCE의 후방을 지키고 있다. ‘김덕길 없으면 행사불가’라는 유언비어가 돌 정도.

그 외 몇몇 분은 항상 카메라를 피해 다닌 때문인지 사진이 없다. 어쨌든 다 같이 큰 고생했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번 개인열전에 이어 다음에는 그룹열전을 이어보겠다. 집단구타의 현장 외 볼 만한 사진이 제법 있다. 기대하시라~!

2010/07/30 19:27 2010/07/30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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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里 Sea Br
바다는 너와 나, 우리를 잇는 드넓은 다리입니다. 바다의 땅 통영의 한 쪽, 작은 마을이고 싶습니다. 그림:<통영항> 전혁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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