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을 쥔 손, 그 안에 있는 것들

섬 섬 섬 2009/11/17 18:53



‘배움마실’이라는 이름으로 연대도, 곤리도, 욕지도, 사량도, 죽도에 어르신 한글학교를 연 지 8개월. 처음 한두 번씩만 배움마실을 챙겼을 뿐, 나머지 모든 짐은 바쁘다는 핑계로 선생님들께만 지우고 있다가 ‘보고서’라는 걸 준비하라길래 오늘 죽도부터 찾았다. 가는 내내 발등에 떨어진 다른 불 때문에 맘이 편치 않았을 뿐 아니라 내일 욕지도, 모레 사량도 일정까지 떠올리니 오지랖 넓게 이 일 저 일 다 끼어든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온다. 이러다가 내 일은, 내 원고는, 내 책은 언제 만든단 말인가!

그리고 들어간 배움마실. 초등학교 수준에도 못 미치는 할머니들의 공부를 도와주다말고 나는 그만 가슴 한쪽이 시리고 말았다. 연필을 쥔 할머니들의 손에서 호미를, 낫을, 바늘을, 그물을, 칼을 보고만 것이다. 평생 그런 것들만 쥐느라 여태 연필 한 번 잡지 못했던 손. 연필잡이를 70이 넘도록 미룰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바로 자식들에게, 나에게 있었던 것이다. 이 어른들의 손에 연필 하나 쥐어주는 것만큼 갸륵한 일이 또 어디 있으랴. 다른 어떤 내 일, 내 원고, 내 책이 이보다 무거울 수 있으랴! 삶 그리고 의미라는 것이 연필을 쥔 할머니들의 손 안에 고스란히 들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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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마음 아프게 하시는군요.
다음 일을 못하게시리 -

그래도 잘 지내시지요?
posted by 실비단안개 at 2009/11/17 22:54 REPLY MODIFY / DELETE
네 잘 지냅니다.
그래도 배움마실에서 많이 웃으셔서 마음 한 켠이 차오릅니다.
posted by  바다里 at 2009/11/18 16:18  MODIFY / DELETE
'다른 어떤 내 일, 내 원고, 내 책이 이보다 무거울 수 있으랴! 삶 그리고 의미라는 것이 연필을 쥔 할머니들의 손 안에 고스란히 들어 있었던 것이다.'

저 메마르고 거친 손들로 연필 잡은 모습이, 돌잡이 아이의 손 마냥 사랑스럽고 애잔합니다. 저 분들은 바다리님처럼 애쓰시는 여러분들로 인해 유년에 배웠어야할 생의 기쁨을 이제라도 누리게 되시니 수고하시는 모든 분들 복 받으실겁니다.
posted by 바람흔적 at 2009/11/19 12:31 REPLY MODIFY / DELETE
더 열심히 해야 겠구나...싶을 따름입니다
posted by  바다里 at 2009/11/19 18:35  MODIFY / DELE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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