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고왔던 수직 마을, 고속도로에 갖히다
가방 싸기 2009/09/16 18:06
수직마을 입구에서 마을을 바라본 전경.


"줄 끼 암 것도 없어요. 거기 나무에 무화과라도 따 드이소. 약 한 번 친 적이 없어요”
수직마을 이장 집을 찾았을 때 2층에서 이장댁이 무안하다는 듯 던진 첫마디다. 그 넉넉한 배려 탓에 몇 개 따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데 이번엔 이장이 나와 “와 그것만 묵십니까, 더 잡수소~” 하더니 주름진 두 손 가득 무화과를 직접 따서 일행들에게 일일이 나눠준다. 광도면 발자취 찾기 사업을 하다보면 “뭐하러 왔소?” “할 말도 업소” “바쁘요”하는 말로 일행의 맥부터 빼놓는 데가 적지 않은데, 수직마을은 무화과 하나만으로도 왠지 느낌이 좋다.
그 감은 틀리지가 않아서 마을회관 2층에서 흔히 말하는 ‘대박’을 만났다. 마을에서 공동으로 쓰던 사모관대와 족두리는 물론이고, 보디와 삼칼, 솔 등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옛것들이 시간을 거꾸로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 딛고 있는 데서 그곳의 옛날을 들춰보는 것을 어찌 박물관 관람에 대랴. 동네 총각장가 가는 날이 곧 마을 잔치였던 수직마을의 덩실덩실 왁자지껄 알록달록 맑고 밝은 풍경이 사모관대 위에 오버랩되면서 꿈결 같은 길이 겹겹이 펼쳐진다.

보관상태가 좋지 않아 다 헤어졌지만 옛 수직 마을의 혼사를 그리는 데도 모자람이 없다.

이 라디오가 마지막으로 들려준 소식은 무엇이었을까?

왼쪽의 술잔이 웬만한 와인잔보다 깊어 보인다.

삼베를 한 번도 짜본 적이 없으니,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을 달아놔도 이해가 잘 안 된다.

추씨 집성촌이기도 한 수직마을의 옛 족보라고 한다.
“베리모 뭐하끼고, 눈에 뵈는 대로 모돴다.”
5년째 수직마을 이장을 맡고 있는 어르신은 마을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그 애정 탓에 수직마을은 광도면뿐 아니라 전국의 마을 시골 마을에도 없을 마을 유품 전시관을 갖게 된 것이다. 그것이 비록 한 자도 안 되는 낡은 유리관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마을의 숨결을 간직하는 데는 조금도 좁지 않다.
“요기 옆에 2층 집이 원래는 종가집이었는데, 아매 통영에서도 제일 컸을 끼다”
혼삿날이나 제삿날이면 솥두껑 뒤집어서 돼지 비계에 호박전을 붙이고, 보리와 갯기를 태우며 모기를 쫓으며 밤을 새던 종갓집 마당은 이젠 기억에만 남았다. 징집을 피하려고 안청 장문에 숨기도 했던 그 종갓집은 진윤숙 위원에 따르면 “마루가 너무 좋아서 집에 안 갈려고 기를 쓸 정도”로 기품이 있었다지만 이젠 사진으로조차 마주하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93년 5월 8일 어버이날 경로잔치 모습이다. "모두 세상을 버리셨지"라는 말이 귀에 맴돈다.

마당이 작아지면 잔치도 줄어들기 마련이다. 정월 대보름 매구도 이젠 “칠 사람이 없어” 생각조차 못하고 있고, 그나마 마을회관에서 벌렸던 경로잔치도 4년 전부터는 없던 일이 되었다. 낙이라고 해봐야 시내 식당가서 밥이나 한 끼 먹고 오거나, 어버이날 관광버스에 오르는 게 전부이다시피 되어버렸다. 한 겨울, 기름값을 아끼려고 잠시 들러 엉덩이를 데우는 것을 빼면 마을 사람끼리도 얼굴 보기가 어려운 게 현실이다.


“굴만 만들어줬어도 대촌에라도 나갈 낀데...”
이장은 대촌과 수직마을을 가르는 고속도로를 가리키며 한숨을 쉰다. 다리를 놓을 것인가 둑을 만들 것인가를 두고 주민설명회니 뭐니 형식적으로만 하더니 결국 고속도로는 토지공사 입장에서 가장 ‘경제적인’ 방법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그 탓에 수직 마을과 대촌을 오가던 길이 둑으로 막혀버렸고, 고속도로 아래 찻길로 경운기라도 끌고 가려고 해도 싱싱 달리는 차 때문에 위험천만 상황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방앗간에서 나락도 지고 오고, 나무도 해오며 콧노래도 하던 길”이 이젠 “무서바서 당췌 갈 수가 없는 길”이 되어버린 것이다. 도시와 도시를 빠르게 잇는 고속도로가 정작 마을과 마을은 단절시켜버린 이 씁쓸한 풍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억울해서 데모도 하고, 드러눕기도 했지만 돈이 많이 든다카면서 굴을 안 내준다 아이가. 인자 우리도 포기해삣다”는 이장의 얼굴을 차마 바로 볼 수가 없다.
수직마을은 ‘무지기’ 마을이라고도 불린다. 무제(무제)를 지냈던 산기슭이었기 때문에 무지기촌이라고 했다고 하지만 이장은 물이 좋아 그렇다고 한다. 집집마다 지하수가 넘쳤고 논에도 물이 그득해서 한 집에 경운기 2대가 기본이었지만, 지금은 못 쓰게 되어 황토로 덮어버린 논이 더 많다. 경운기 돌릴 일이 없다는 것이다.


노는 경운기가 지천에 늘렸는데도 수직마을엔 소가 많다. 쟁기를 끄는 소가 아니라 축사에서 식용으로 기르는 것들이다. 서른 두 가구 중 축사를 가진 데는 세 집뿐이지만 광도면을 통털어 가장 많은 한우를 보유하고 있다.
노오랗게 익어가는 벼가 정오의 햇볕을 반사할 즈음, 신작로를 돌아나오던 일행은 생뚱한 풍경에 눈이 동그래지고 말았다. 들판 한 가운데서 문어를 늘어놓고 선풍기로 말리고 있는 것이다.
황리가 고향인 김형도(67)씨가 수직에서 10년째 운영하고 있는 문어 덕장은 광도면보다 삼천포에서 더 유명하다. 판로를 삼천포쪽으로 뚫었기 때문이다.
스페인 라스팔마스 원양어업기지에서 잡은 문어를 급랭시켜 수직으로 보내오면 이것을 볕에서 해동하고 말리다가 연탄불에서 다시 말린다. 고소하고 짭쪼름한 맛을 위해서다. 그런 뒤 또다시 말리면 되는데, 겨울에도 반드시 선풍기 바람을 쐬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색깔이 누렇게 나와 때깔이 좋지 않다. 그저 시간만 보내면 될 일 같지만 정성이 예사로 드는 게 아니다. 선풍기만 해도 이리 옮겼다 저리 옮겼다 여간 분주하지가 않다.





특히 제사상에 올라가는 놈들은 ‘인물’이 중요한데, 인물의 핵심이라 할 ‘문어 대가리’ 모양을 내는 것은 아내의 몫이다. 삼천포에서 사온 대나무를 하나 하나 정성스레 끼우는 아내를 보며 김형도씨는 “나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잘라 말한다. 아내의 공을 치켜세우고 싶은 것이다.
“처음에는 북한 문어를 썼는데 맛이 영 달라지더라고. 그래서 라스팔마스 것을 써보니 훨씬 낫길래 계속 그걸 쓰고 있지.”
문어는 해동에서 완성까지 4,5일이면 되고, 한 마리에 3만5천 원 선에서 팔린다. 원재료까지 꼼꼼하게 따지는 김형도씨의 정성을 헤아리면 사는 이가 되려 미안해지는 가격이다.
“이 사람 하고, 저기 멸치 유통하는 데 하고 명절이나 마을에 일 있을 때마다 문어랑 멜치랑 갖다주니까 고맵지. 그래서 아직 사는 재미가 있거마는”
문어덕장을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이장은 김형도 씨의 칭찬에 마음이 바쁘다. 사람이 진득한 데가 있다는 것이다. 멸치 유통하는 데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도로 건너편에 있는 한려물산 건물이다. “토영서 멜치를 판다고 하면 젤 크기 알아주는 기라”는 한려물산은 통영시 정량동에 본사를 두었지만, 수직 마을뿐 아니라 우동리 일대에서 ‘어른을 아는 경우가 있는 회사’로 통한다. 마을 주민들의 이런 입소문은 결코 멸치 몇 박스만으로 살 수 없는 것이리라.



수직마을을 빠져나오는 길. “점심을 못 디리서 우짜노” 걱정하시던 이장님이 음료를 가득 쌓아둔 창고로 가더니 “손님들 좀 주거로 깡통 좀 갖고 오라” 하신다. 그 말에 젊은 직원은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우리 일행에게 음료를 나눠준다. 그걸 마시려고 고개를 드니 주차장 담 너머로 대문이 없는 집이 눈에 들어온다. “요기는 대문 있어도 다 열어놓고 댕기는데 뭐”하는 말씀이 긴 여운을 남긴다.





좋은 말만 골라 만든 군민헌장의 구절구절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게 한다.

언제적인지는 모르겠으나, 수직마을 전경 사진이 마을 회관에 걸려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