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List :  김효용 : 1 posted

보고싶은 얼굴 4 -양자강

홀로 아리랑 2006/06/07 18:26
만리장성, 자금성, 북경루, 왕자각, 광산각...
중국집 이름에 또 빠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양자강'.

강대철 교장 선생님의 부임은 청춘, 낭만, 도전, 추억에 대한 바리게이트나 진배 없었다. 이미 고인이 되신 분을 지금에 와서 굳이 탓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다시금 생각해도 내 고등학교 시절을 온통 암담하게만 만드신 당신께 나는 여간 섭섭하지 않다. 내 고향이 그래도 알아주는 예향인데...라는 생각이 들면 더 그렇다.

자퇴하거나 자율학습이라도 거부하지 못했던 내게 일차적인 원인이 있겠지만, 감수성이 좋을 때에 음악과 미술을 못하게 한 것이라든지, 우리 손으로 꾸리는 동호음악제가 끝나고도 자율학습(실은 타율 또는 강제학습이었지만)을 강제했던 것은 너무한 처사라는 생각 뿐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수업을 강행하셨던, 그래서 시화전도 여셨던 미술선생님 생각도 나는구나)

하긴, 생을 사는 방식이 다른 만큼, 생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따지는 것도 각자 다르겠다. 동기들 중 다른 이들은 그때 그렇게나마 공부를 시켜주셨기에 이만큼 됐다고 자부하는 이도 적지 않으리라. 하지만 나는 아니다. 아무리 돌이켜봐도 내 고등학교 시절은 서글프기만하다.

억지로라도 기억을 꼬집어서 교장선생님께 고마워할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덕분에 '양자강'을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후 수업이 끝나고 야간자율학습이 시작되기 전의 1시간. 남망산 아랫동네에 사는 내게는 저녁 먹고 다시 학교로 나오기에는 벅찬 시간이었고, 그래서 저녁은 봉평삼거리에 있는 양자강에서 월식(月食)을 했었다.

양자강에는 나처럼 집이 먼 친구들 뿐 아니라, 버스타는 시간이라도 줄여서 한자라도 더 익히겠다는 친구도 있었고 그저 짱께가 조아서 오는 친구들도 있었다. 월식하는 친구들이 아니어도 저녁 때 양자강은 항상 붐볐는데, 그 까닭 중 하나로 '뽀르노'를 빠뜨릴 수 없다. 나로서는 생애 처음으로 뽀르노를 본 곳이 바로 양자강이다.

양자강에서 생애 처음인 것은 또 있다. 바로 양자강 사장님이시다. 그때까지만 해도 통영이라는 좁은 땅을 한번도 떠나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사투리(그땐 토영말이 표준말인줄 알았지만)가 다른 이와 대화하게 된 것은 그분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물론 '대화'라는 것이 어려웠던 선생님들을 빼면 말이다.

'별보기 운동'을 방불케했던 그 시절 나는 저녁시간을 참 많이 기다렸다. 양자강에 가면 다른 반 친구들과도 부딪히고, 사투리가 다른 그 사장님과 홍금보를 닮은 배달 아저씨와 함께 그때까지만 해도 지루하고 반복적인 어떤 고정시계에서 벗어나 색다른 리듬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하긴 참, 저녁시간마다 농구장에서 벌어진 농구경기도 그렇게 보고 싶어했었다.

아마도 제주도 출신이라는 양자강 사장님은 다정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친구들이 모두 기억할 만한 것으로는 대입고사장에 펄럭이던 그 깃발을 빼놓을 수 없을 게다. 나는 상고에서 시험을 친 탓에 그 깃발을 직접 보지는 못하고 사장님과 그집 아저씨로부터 응원을 갔었노라는 말씀을 듣기만 했지만, 그 마음 씀씀이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우리 앨범에도 통고인의 건투를 비는 양자강의 응원 깃발이 날리는 사진이 한 컷 들어있지 싶다.

시험이 끝나고, 더 이상 월식을 할 이유가 없었을 때, 같이 월식하던 친구 몇 명이서 양자강을 찾아간 기억이 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중국집을 방문하면서도 우린 빵과 케익이 이쁘게 찍힌 액자를 선물했더랬는데,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벽에 거시면서 '고맙다'라는 세 글자를 참 속에서부터 뱉어 내시던 표정이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졸업식 날에는 기동이랑 같이 양자강에서 짜장면 시켜놓고 소주도 한잔했다. 기동이나 나나 그 나이에도 '이게 아닌데'라는 어림짐작이 있었고, 욱 또는 제기랄 하는 심정으로 대낮부터 두어병을 비웠더랬다. 그때도 우리 곁에는 인생선배로서 양자강 사장님이 계셨더랬다. 지나봐야지만 세상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니 열심히 살아볼 일이다라는 말씀을 얹어주시면서.

대학 진학 후에는 효용이와 성환이와 함께 가서 잡채와 짬뽕 국물에 소주를 나눴던 적이 있다. 나도 모르던 참에 파고든 혼동이라는 것을 그 양자강 가족들과 함께 풀어내는 멋이 있어서 밤 늦도록 제법 마셨던 것 같다. 술 깨는 데 좋다며 사모님이 그 늦은 시각에 손수 내어 오신 커피향도 지금까지 알싸하다.

친구들도 그렇겠지만 고향가면 도남동으로 향할 때가 있다. 그러자면 꼭 봉평삼거리를 지나치게 되는데, 눈길이 꼭 양자강 쪽으로 가게된다. 언제이던가 제법 오랜만에 고향에 갔다가 양자강에도 가보고, 통고에도 들려볼 양으로 봉평삼거리에서 버스를 내렸는데, 양자강은 없어지고 말았더구나. 쓸쓸한 발길로 통고를 향했더랬는데, 겨울철 점심 시간에 줄을 섰던 그 라면 자판기는 그대로 있더구나.

가게가 잘돼서 더 나은 장사라도 하시는 지 알 턱이 없지만 자판기만큼 양자강도 그 자리에 오롯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가시질 않더구나. 때문인지, 서울에서도 '양자강' 간판을 볼 때마다, 봉평 삼거리 그 훈훈하면서도 왁자지껄했던 양자강과 그곳 사람들이 불쑥 떠오르곤 한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