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케이블, NO 배터리, NO LCD... '종이 책'은 힘이 세다
홀로 아리랑 2006/05/28 15:43재작년 9월에 한 소녀를 만났다. 당돌하게도 ‘마리화나’라는 닉네임을 쓰는 그녀는 고3이었는데, 나는 그녀의 블로그에 너무나도 반했었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한 구절을 읊으라면 ‘오래된 마루에선 외할머니 냄새가 난다’던가. 고3이 어쩜 이리도 좋은 글을 쓸까 싶다가도 고3이 아니라면 이처럼 상큼하기도 어렵겠노라 여기기도 했다. 이 블로그를 혼자만 보는 게 아까워서 ‘책’으로 엮어 볼 참이었다. 물론, 상업적인 계산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잘만 하면 대박’일 거라는 기대를 분명 품기도 했으니까.
부산 역 광장 커피숍에서 만난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였다. 혹시 내가 신종 사기꾼은 아닐까 걱정도 했다는 그녀의 어머니는 고3인 딸이 인터넷에 빠져 있는 게 못마땅하기도 했지만, 여기저기서 딸의 블로그를 보고 칭찬이 많아서 ‘소녀 작가’를 둔 듯 으슥하기도 하다고 했다. ‘책까지’ 내겠다고 서울서 달려온 나를 보니 더욱 그렇다고 했다.
소녀의 블로그는 그림들이 많고, 그 그림이 이야기와 아주 잘 조화된 것이었다. 그림이 없이는 이야기의 맛이 반쯤은 사그라질 것 같았다. 문제는 그 그림이 직접 그린 것이 아니고, 출처가 불분명한 것이 많아 책으로 내려면 저작권부터 해결을 해야 했다. 더군다나 명작을 인용한 것도 없지 않아 이래저래 고민하던 나는 참 속편하게도 내 욕심을 포기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한마디로 ‘게을러서’ 책을 못낸 것이다. 한 소녀와 어머니를 들뜨게 한 것 치고는 참 염치없는 짓이기도 했다.
좋지만은 않은 옛 기억이 떠오른 것은 <블로그 ON>이라는 책을 선물로 받아서다. 저자를 ‘이글루스 피플 17인 지음’이라고 소개한 이 책은 어떤 주제가 없이 ‘블로그’라는 고리로만 엮여 있다. 시집이나 소설책은 물론 아니고, 그렇다고 에세이집이나 학습서, 요리책, 사진집, 컴퓨터 서적도 아니지만 이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이야기들이 곳곳에 들어 있다. 나쁘게 말하면 ‘잡탕’이고, 꾸며서 말하면 ‘퓨전 북’이다. 이 책의 서문을 옮기면 “(이글루스 블로거 17인) 그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관심사와 글쓰기는 현실의 연장 혹은 대안으로서의 인터넷 문화를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고 되어 있지만, 굳이 ‘인터넷 문화’라고 할 것 없이 ‘요즘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잘 담아냈다.
이 책은 남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내가 한 소녀의 블로그를 책으로 묶고 싶었던 것처럼 온/오프라인의 교감, 또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만남이다. 사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구분하고 디지털과 아날로그로 나누는 것은 이미 낡은 이분법이다. 책은 오프라인이자 아날로그고 인터넷은 온라인이자 디지털이라고 정의할 까닭 자체가 없어졌다. 온라인 인구 속에 오프라인 인구가 아닌 사람이 없지 않은가. 이미 온라인에서 소비된 컨텐츠를 오프라인으로 다시 엮은 <블로그 ON>과 같은 책들은 이 낡은 이분법이 더 이상 무의미한 것을 반증하는 한편으로 책이 책 자체로서 훌륭한 미디어이자 무한한 생명력을 가지는 것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브래태니커 백과사전이 CD-ROM 타이틀로 나왔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호들갑을 떨었다. 이제 종이 책이 없어질 것이란 것이었다. 때맞춰 CD-ROM 타이틀에 동영상을 곁들인 기사를 담은 <사이버 컬처>라는 잡지까지 등장했었다. 멀티미디어라 책보다 훨씬 효과적이고 찾아보기(검색)도 쉽다고 봇물처럼 쏟아진 그 많던 CD-ROM 타이틀들! 하지만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새 미디어로 추앙받던 CD-ROM 타이틀이 인터넷에 밀리는 동안에도 책은 여전히 그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다. 들고 다니기 편하고 발음까지 들려주는 전자사전이 대박을 터트려도 종이 사전은 여전히 잘 팔리고 있다. 작년만 해도 사전류의 판매량은 재작년보다 오히려 늘었다고 한다. 인터넷 때문에 출판시장이 다 죽는다는 엄살은 유통의 문제에 있는 것이지 책 자체의 후퇴에 있는 건 아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책을 사고 서재를 넓혀간다. 이것은 비단 책에 대한 경외감이나 향수 때문만은 아니다.
요즘 모든 디지털 기기들이 외치는 슬로건은 “언제 어디서나 즐긴다”는 것이다. 하긴 휴대폰 하나면 인터넷, 게임, 음악, 동영상, e-북을 즐기는 세상이다. 그러니 휴대폰 등 모바일 기기의 배터리를 즉석에서 충전하는 모바일 충전기까지 등장할 정도다. 하지만 아무리 잘난 디지털 기기라도 콘센트도 배터리도 필요 없고, 액정도 버튼도 이어폰도 필요 없는 책만큼 편하지는 않다. 블루투스, 와이브로, USB, IEEE 1394, 센트리노.... 이 모든 규격에서 영원히 자유로운 단 하나의 와이어리스 미디어가 있다면 그것은 책이다. 그냥 책이 아니라 ‘종이 책’이다.
-2006년 1월 20일 이글루스 칼럼




